두더지 구멍

마음보인 하루 2007/06/08 16:08 by 낯선하루



 오월의 따스한 햇살과 푸릇푸릇 돋아나는 여린 녹찻잎이 가지런한 녹차밭을 걸었다.
녹차밭 중간쯤에 인적이 드문 길 한 가운데 주먹만한 두 개의 구멍이 보였다.
마치 기다란 파이프를 박기 위해 일부러 파 놓은 듯한 두 개의 구멍.
아무 생각 없이 그 옆을 지나가려는데 구멍 하나에서 흙이 움찔한다. 나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두더지다.
파이프 구멍이 아니라 두더지가 파 놓은 구멍이었다.
순간 카메라를 꺼내 들고 주저 앉아 숨을 죽였다.
구멍 속의 두더지도 코끝을 쫑긋거리며 숨 죽이고 있겠지.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구멍은 다시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그리고 한 무리의 관광객마저 이리로 몰려 오고 있었다.
겁 많은 두더지는 벌써 저 멀리 가 버렸겠다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조심스레 구멍을 파 보았다.
깊은 속에서 연결이 되어 있는 두 개의 구멍.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두더지의 흔적.
두더지는 길을 잘못 들었다.
인적 없는 녹차밭 사이로 뚫던 굴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가운데라니 얼마나 놀랐을까?
다시 되짚어 내려가서 새로운 굴을 뚫던 두더지는 서투른 놈이었을까? 바로 그 옆으로 또 다른 길을 내고 말았다.
연이은 실패. 그리고 두려운 사람의 발자국소리에 녀석은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기다리는 그 시간에
두더지는 제 눈보다 더 작게 오그라든 가슴에서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었을 것이다.
나란히 놓여있는 구멍 두 개 만을 남겨 놓고 떠나버린 두더지.
가끔 내가 파고 있는 이 굴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묵묵히 땅을 파면 앞으로 전진하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간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지상을 향해 구멍너머로 부끄러운 고개를 내밀어보면,
내가 원하는 곳에서 한 참을 떨어진 엉뚱한 곳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곳이 어디지?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가 아니다.
실은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잘못 들어선 길 옆으로 다시 새로운 굴을 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 고개를 내밀어보면 상황은 똑같다.
어둠 속에서 굴을 파고 있을 때는 모르던 두려움이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면 또 다시 가슴을 파고 든다.
화창한 오월의 녹차밭.
그 푸르름처럼 내 마음은 푸르지 못했다.
잘못된 두 개의 굴을 판 저 두더지와 같이,
나도 내가 파던 굴이 목적지가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굴을 파야만 한다.
그러나 새로운 굴은 과연 내가 원하던 그 목적지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인가?
두렵기는 두더지나 나나 마찬가지다.
다르다면 두더지는 벌써 새로운 굴을 파고 있고,
나는 아직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이렇게 두더지가 떠나버린 구멍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는 새로운 굴을 파러 떠난다.
이 굴이 또 다시 어긋난 곳으로 나를 데려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굴을 파는 동안은 그 굴 파기에만 전념을 하자.
이 새로운 길은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날 데려다 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나도 서투른 한 마리의 두더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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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호우 2007/06/12 23:07  주소 /  수정 / 삭제 /  답글

    수련중이라는 말씀 전해 들었어요.
    머지 않아 뵈올 날을 기다리며 깊은 내공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보고시포용~~~~

  2. BlogIcon 팟쩌 2007/08/05 17:21  주소 /  수정 / 삭제 /  답글

    네... 보고싶네요....

  3. BlogIcon 행운가득 2007/09/10 22:45  주소 /  수정 / 삭제 /  답글

    지나가다 들렸어요~ 잘 보고 갑니다~

  4. BlogIcon 샤샤 2007/10/30 13:35  주소 /  수정 / 삭제 /  답글

    두더지 구멍이라니...와....

  5. BlogIcon 비누 2008/04/19 20:27  주소 /  수정 / 삭제 /  답글

    하루님을 쫓아 다니면 마음이 정화가 될것 같아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참 풋풋하셔요